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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콜라스 스타가르트 저 / 김 학이 역 | 교 유서가 | 2024 년 02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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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학살과 폭격의 의미를 히틀러, 괴벨스, 독일군, 독일 시민 승자와 가해자, 공포와 희망의 뒤섞임 일기와 편지와 법정 기록으로 들여다보는 전범국의 내면 “탁월하다! 이 책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저자가 광범한 정치적?군사적 전개를 생생한 일상사와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나치 수뇌부의 비밀스러운 책략가로부터 평범한 독일인들이 그것들을 경험하면서 갖게 된 믿음과 감정으로 나아간다.” _가디언(The Guardian) * 영국 펜(PEN)이 수여하는 헤셀틸트먼상 수상작(역사 부문) 독일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그들에게 2차대전은 나치즘보다 정당했다 1944년 11월 17일, 독일군 장교인 빌름 호젠펠트는 바르샤바의 한 주택에 들어섰다. 해골 모습의 유대인이 부엌에서 음식을 찾고 있었다. 밤이 되자 호젠펠트는 유대인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쇼팽의 곡에 귀기울였다. 그 유대인이 바로 영화 〈피아니스트〉에 등장하는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다. 호젠펠트는 슈필만이 건물 다락에 숨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정기적으로 음식도 가져다주었다. 1936년과 1938년의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강렬하고 신비스러운 전율을 느꼈던 독일군 장교와 호젠펠트는 동일한 인물이다. 그는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호젠펠트는 2차대전에서 무엇을 위해 적과 싸웠을까? 독일이 일으킨 전쟁은 그의 내면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그리고 언제 그는 독일의 전쟁범죄를 인식했을까? 이 책은 2차대전 사료로 독일인의 혼란스러운 속내에 접근한다. 집이나 길거리에서 포착된 수많은 내밀한 이야기로 2차대전의 편견을 헤집는다. 일기, 편지, 보고서, 법정 기록에 담긴 독일인의 생생한 육성은 전체주의의 전쟁범죄에 숨은 낯설고 새로운 진실을 증언한다. 그 진실이란 독일 국민이 패전의 순간까지 적극적으로 2차대전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그들이 내면에 품었던 민족방어 전쟁 논리가 나치즘과 결부되며 어떻게 발전했는지 뒤따라간다. 이 책의 저자는 정보의 넓이를 담보하고자 편지와 일기와 공문서 등을 검토했다. 슈투트가르트 현대사도서관에서 편지 약 2만 5천 통을 살펴보거나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독일 일기아카이브,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역사박물관과 커뮤니케이션 박물관 전선병사 아카이브와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프라이부르크 독일 연방문서보관소-군사아카이브를 찾아갔다. 정보원들의 공문서, 독일군 우편행낭을 무작위로 검사한 검열관들의 보고서, 개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일기 등을 채록했다. 정보의 깊이를 확보하고자 저자는 사회적 출신이 각양각색인 사람 중에서 특정 개인들을 선택했다. 그들의 사적인 희망과 계획이 전쟁 과정과 어떻게 얽히는지 오랫동안 추적했다. “이 책은 그 길었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 전쟁에서 발생한 독일 사회의 변화를 목록화하고 갈수록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 전쟁에 각 개인이 적응해간 미묘한 방식들, 종종 되돌릴 수 없던 그 방식들을 기록한다. 또한, 이 책은 사람들이 자신을 형성해간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겪은 변화하는 기대와 파동하는 희망과 두려움을 기록한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경험을 재는 감정적인 잣대인 동시에 자기 파괴의 길을 가던 한 사회를 나타내는 도덕적 기압계였다.” _48쪽 저자는 전쟁에 대한 해석이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의식 모두에서 둘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그 두 가지 해석은 전쟁 시기의 독일인을 이야기할 때 상충한다. 한쪽은 모든 독일인을 희생자로 간주하고 다른 쪽은 모든 독일인을 가해자로 분류한다. 저자는 2005년의 종전 50주년 기념 과정들을 지켜보며 이 책의 출발점인 생각과 마주했다. 그는 기존의 역사가들이 올바른 교훈을 전쟁사에서 이끌어내려다가 역사 연구의 본질적 과제 중 하나를 외면했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역사가가 무엇보다도 우선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39년 8월 26일에 동원령이 공포되었을 때 독일인은 미래를 몰랐다. 그들은 과거를 떠올렸다. 1차대전 패전이라는 불안한 그림자가 그들에게 드리웠다. 전쟁의 위기가 사회를 과격하게 변화시킨다는 생각은 나치 정권과 독일 사회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역사가 대부분은 함부르크 폭격과 스탈린그라드 패배가 독일인을 패배주의로 몰아넣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독일인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치즘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내면에 집중하는 이 책은 상식과 다르게 2차대전을 설명한다. 독일인에게 2차대전은 나치즘보다 정당했다. 그 이유는 전쟁이 생산해낸 종말론에 있었다. 그들은 의도적이고 폭력적인 정복 전쟁을 민족 방어 전쟁으로 여겼다. 전황이 악화될수록 애국적 헌신으로 더욱 단호히 제 나라를 방어하려고 했다. 독일 사회가 종말론적 사고방식을 수용한 일이야말로 2차대전 후반기에 독일인에게 발생한 결정적 변화였다. 목차 지도 서언 편지와 일기의 주요 주인공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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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이 책은 내가 지난 20년 넘게 2차대전 동안 독일에 살았거나 독일 점령하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원래 나는 이 책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2005년에 『전쟁의 증인들: 나치 치하 어린이들의 삶』을 발간한 뒤, 나 자신과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던 다른 이들에게 이제 더는 어린이, 홀로코스트 혹은 나치 독일에 대하여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책은 2차대전에서 독일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에 대한 짤막한 논문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뭔가 말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느꼈다. 그 작업이 내가 2006~2007년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커지기 시작했다. p.17 이 책은 그 길었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 전쟁에서 발생한 독일 사회의 변화를 목록화하고 갈수록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 전쟁에 각 개인이 적응해간 미묘한 방식들, 종종 되돌릴 수 없던 그 방식들을 기록한다. 또한, 이 책은 사람들이 자신을 형성해간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겪은 변화하는 기대와 파동하는 희망과 두려움을 기록한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경험을 재는 감정적인 잣대인 동시에 자기 파괴의 길을 가던 한 사회를 나타내는 도덕적 기압계였다. p.48 학살 작전은 대부분 사람들 눈을 벗어난 숲이나 연병장에서 자행되었지만, 일부는 구경꾼들 앞에서 벌어졌다. 1939년 10월 7일 토요일 저녁 스비에치에 주둔중이던 병사들이 그날 낮시간에 벌어진 학살 작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전은 다음날 일찍 재개될 예정이었다. 그날 아침 이른 시각 파울 클루게 상병이 학살 구덩이 가까이로 갔다. 학살 기록을 남긴 병사들은 흔히 자신이 목격한 첫 장면을 기록한다. 그때 받은 인상이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다. 클루게는 기록했다. 버스가 유대인 묘지에 도착하고 한 여성이 아이 셋과 함께 내렸다. 가족은 30미터를 걸어 구덩이까지 갔다. 여자는 막내는 품에 안은 채 구덩이 안으로 기어내려갔고, 이어서 위에 서 있던 다른 한 아이를 안아서 구덩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지막 아이는 친위대원이 들어서 아래로 건네주었다. 여자가 아이들과 함께 구덩이 안에 엎드렸다. 클루게는 구덩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까지 갔다. 친위대원 네 명이 20센티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엎드린 네 사람의 목에 총을 겨누었다. 일을 끝낸 그들이 구경하던 클루게에게 시체를 흙으로 덮으라고 요구했다. 클루게는 주저하지 않고 복종했다. p.75~76 알브링과 몰덴하우어와 달리 독일군에는 ‘처형 여행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빨치산들이 공개적으로교수되는 모습을 찍었다. 예비경찰대 대원 헤르만 기셴은 브레멘에서 가게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찰 대대가 어려운 과제를 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일이 ‘폴란드에서와 조금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리가에서 그는 영사기를 구입했다. 경찰 대대가 라트비아와 러시아에서 행할 작전을 찍어놓으면 그 필름이 ‘후에 기록이 되고 우리 아이들에게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1941년 8월 7일 그는 아내 한나에게 그의 경찰대가 벌인 작전에 대하여 썼다. 전날 밤 ‘유대인 150명이 사살되었어.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모두 제거되었어. 유대인들은 완전히 절멸되고 있어. 사랑하는 H, 제발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그것은 그냥 그래야 해요.’ p.252 1941년 11월 초 그 포로수용소에 친위 특공대가 도착했다. 전쟁포로와 민간인 중에서 유대인을 빗질하기 위해서였다. 특공대는 그때 가려낸 유대인들 일부를 시멘트 공장 지하실에서 사살했다. 야라우쉬는 집에 보낸 편지에서 그 일에 대하여 암시만 했다.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주던 포로는 절반의 유대인이었는데, 야라우쉬는 아내 샤를로테에게 보낸 편지에 그 남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쓰지 않았다. 다만 ‘유대인들이 맨발로 눈 위를 걷는 것’을 보았다고, ‘내가 막을 수 없던 힘든 것들이 매우 고통스러운 인상을 주었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집에서) 말로 설명하겠다’라고만 썼다. 이틀 뒤 그는 새로운 러시아어 선생으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교 교사인 모스크바인에 대해서는 보다 열성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투르게네프 소설을 큰 소리로 읽어주자 ‘마치 내가 그 나라의 영혼을 만지는 느낌, 그 영혼이 스스로를 지각하고 아는 방식으로 그 영혼을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p.279~280 한스 알브링은 집단군중부 후미의 소도시 벨리시에서 겨울을 났다. 1942년 1월 말 소련군이 공격해오자 병사들은 끔찍한 조건 속에서 8주일을 버텼다. 씻지 못하고, 이에 갉히고, 배고픔에 시달리던 한스는 그 상황을 ‘최후의 심판과 비교하는 것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라고 믿었다. 1942년 3월 21일 그는 친구 오이겐 알트로게에게 ‘이 경험 속에서 나는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라고 쓴다. 소련군의 공격이 멈추고 2주일이 지난 뒤 알브링은 뮌스터의 가톨릭 선배로부터 받은 편지에 열광했다. 알브링은 그 편지를 길게 인용함으로써 그동안 자기가 갖게 된 관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누가 알겠어. 우리가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릇되고 갈수록 왜곡되어간 인간관을 추종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새롭고도 진정한 인간관이 우리 내면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 아마 그것이 이 전쟁의 형이상학적인 의미일 거야.’ p.308 결단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죽음으로 간다.’ 예수가 손을 들어 식사를 축복하는 그림을 걸어놓고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그 그림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면제와 가스가 작동하고 있었다. p.374~375 의 유대인과 과장 아돌프 아이히만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아이히만은 클레퍼에게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말했다. ‘알았다는 최종적인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은 잘 진행될 거라고 생각해요.’ 클레퍼가 이번에도 아내 얘기를 꺼내자 아이히만이 단호하게 답했다. ‘합동 이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음날 오후 아이히만이 레나테 문제의 결과를 알려주겠다며 클레퍼를 호출했다. 1942년 12월 10일의 두번째 만남에서 아이히만은 레나테의 출국 비자가 거부되었다고 통고했다. 요헨, 요한나, 레나테는 그들 방식으로 독일을 떠나기로 1945년 4월 중순 독일군 군집단B에게는 무기와 탄약이 없었고, 군대는 루르의 숲과 도시 속으로 용해되고 있었다. 4월 15일 아우구스트 퇴퍼빈의 도시 졸링겐 시민들이 탱크 방어벽을 허물었고, 이튿날까지 그곳의 거의 모든 군인에게 민간인 옷을 건네주었다. 심지어 육군 소령조차 명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이어서 맞지 않는 슈트를 걸치고 스포츠 모자를 썼다. 1945년 4월 17일, 졸링겐이 함락된 그날 군집단B의 총사령관 발터 모델 장군이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림으로써 부대가 미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피했다. 장군 30명을 포함하여 31만 7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모델은 상식과 충성의 자부심 사이에서 괴로워하다가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의 파울루스 장군이 행하기를 원했던 행동을 실천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다음날 미군 제97보병사단이 뒤셀도르프에 진입했다. 마리안네 스트라우스는 독일 당국에 체포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너무나 시달렸던 나머지 열흘 뒤에야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712~713 |
‘관심과 커다란 만족감’을 보여주었다. 강제이송 작전은 1938년 11월의 포그롬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에게 가해진 집단적 가해 스펙터클이었다. 1938년의 포그롬이 히틀러청소년단과 독일소녀연맹의 소년 소녀들이 가세한 대중 축제가 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유대인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는 행렬을 향하여 신구新舊 욕설들로 범벅이 된 구호들과 저주가 쏟아졌다. ‘저 건방진 유대인들을 보라!’ ‘이제 저들은 게토로 간다!’ ‘쓸모없는 식충 무리들!’ 바트 노이슈타트에서 늙고 못 먹은 유대인들이 시장 광장에 집합하자, 나치 활동가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후 그 사진들은 포스터 크기로 확대되어 도시 중심가에서 전시된다. 유대인 행렬이 시장 광장에서 기차역으로 출발하자 ‘시끄럽게 떠드는 학동들 무리’가 기차역까지 행렬을 따라갔고,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p.343 키이우에 유대인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알렸다. 1942년 6월에 휴가를 나왔을 때 발터는 자신이 목격한 대량 학살과 다른 병사에게서 들은 프랑스 유대인 가스 학살에 대하여 카를 뒤르케펠덴과 대화를 나누었다. 뒤르케팔덴은 일기에 고백했다. ‘발터가 거듭해서 강조했다. ……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카를이 충격을 받자, 발터가 설명을 내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어. 그러나 나는 이제 알아.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문제야.’ 처남은 히틀러가 끊임없이 반복했던 주문呪文을 수용했던 것이다. 민족이 종말론적인 선택에 직면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카를이 반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이잖아’. 발터가 곧바로 내놓은 대답은 바로 나치 언론이 공급한 대답이었다. ‘이제까지 진행된 것으로 확실해진 것은, 우리가 패배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행했던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행할 것이라는 거야.’ 카를 뒤르케팔덴은 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남에게 반대하면 가족 안에 공개적인 균열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게슈타포로 밀고가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가족 내 관계가 뒤틀리고 자신이 고립될 가능성이 컸다. p.353~354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 혈통의 가톨릭 개종자들이 발트해 지역으로 이송된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또 주교들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내무부 고위 관리인 한스 글로프케로부터 비밀 정보를 얻기도 했다. 좀머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오스나브뤼크의 주교 베르닝이 1942년 2월 5일에 확언했다. ‘유대인을 완전히 절멸시키려는 계획이 분명 존재한다.’ 이는 하이드리히가 비밀 반제회의, 즉 고위 행정관리들에게 1,100만의 유럽 유대인의 임박한 학살에 대하여 알린 고위급 회의가 열리고 2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베르닝과 프라이징이 ‘인권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비아리아인들을 이송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하는 진정서를 주교회의에 상정했을 때는 그로부터 무려 1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더욱이 1943년 8월의 풀다 주교회의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거부하지 않았어도 실상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때는 유대인 대부분이 사망한 뒤였다. 독일 가톨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베르트람 추기경은 마가레트 좀머가 제출한 보고의 수신조차 거부했다. 그는 프라이징이 교차 서명을 통하여 진실성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좀머의 보고서를 수신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그는 그런 절차가 좀머와 프라이징을 게슈타포에게 노출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르트람이 유대인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몰랐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그가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p.355~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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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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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품필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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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저
© 교유서가 / 문학동네
Nicholas
Stargardt 저 / Khaki
Kim 역 | 교
유서가 |
29.
Februar 202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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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isträger
des Hesseltjesman-Preises (Geschichte), verliehen von PEN UK*
Wofür haben die Deutschen gekämpft? Am 17. November 1944 betrat Willem Hosenfeld, ein deutscher Offizier, ein Haus in Warschau. Ein skelettierter Jude war in der Küche auf der Suche nach Essen. Bei Einbruch der Dunkelheit hörte Hosenfeld den Juden Wladyslaw Szpilman, der in dem Film Der Pianist zu sehen ist, auf dem Klavier ein Stück von Chopin spielen. Hosenfeld half Szpilman, sich auf dem Dachboden eines Hauses zu verstecken, und brachte ihm in den nächsten Wochen regelmäßig Lebensmittel. Hosenfeld war derselbe deutsche Armeeoffizier, der auf den Nazi-Parteitagen in Nürnberg 1936 und 1938 ein starkes, geheimnisvolles Zittern verspürte. Er war eine umstrittene Figur. Warum kämpfte Hosenfeld während des Zweiten Weltkriegs gegen den Feind? Wie hat ihn der Krieg innerlich verändert und wann hat er die deutschen Kriegsverbrechen anerkannt? Dieses Buch befasst sich mit dem chaotischen Innenleben des deutschen Geistes anhand von Archivmaterial aus dem Zweiten Weltkrieg. Es durchbricht die Vorurteile des Zweiten Weltkriegs durch die vielen intimen Geschichten, die zu Hause oder auf der Straße festgehalten wurden. Die lebendige Entwicklung des deutschen Volkes in Tagebüchern, Briefen, Berichten und Gerichtsprotokollen enthüllt eine seltsame neue Wahrheit hinter den Kriegsverbrechen des Totalitarismus: Das deutsche Volk kämpfte im Zweiten Weltkrieg mit aller Kraft bis zum Moment der Niederlage. Dieses Buch zeichnet nach, wie sich die innere Logik des Krieges zur Landesverteidigung zum Nationalsozialismus entwickelte. Um eine umfassende Information zu gewährleisten, haben die Autoren dieses Buches Briefe, Tagebücher und offizielle Dokumente untersucht. Untersucht wurden rund 25.000 Briefe aus der Stuttgarter Stiftung für Zeitgeschichte, der Berliner Akademie der Künste, dem Deutschen Ilias-Archiv, dem Frontsoldatenarchiv des Deutschen Historischen und Kommunikationsmuseums in Berlin, dem Bundesarchiv und dem Bundesarchiv der Bundeswehr in Freiburg, amtliche Dokumente von Informanten, Berichte von Zensoren, die stichprobenartig deutsche Postsäcke kontrollierten, sowie vertrauliche und offene Tagebücher von Einzelpersonen. Um die Informationen zu vertiefen, wählte der Autor bestimmte Personen aus einem breiten Spektrum sozialer Schichten aus und verfolgte sie ausführlich, um zu sehen, wie ihre persönlichen Hoffnungen und Pläne mit dem Verlauf des Krieges verflochten waren. „In diesem Buch geht es um den langen Krieg. Es fasst die Veränderungen in der deutschen Gesellschaft im Laufe des Krieges zusammen und zeichnet die subtilen, oft unumkehrbaren Anpassungen der Menschen an einen Krieg auf, der sich zunehmend ihrer Kontrolle entzog. Sie dokumentiert auch die sich wandelnden Erwartungen, die schwankenden Hoffnungen und Ängste, die die Menschen erlebten, während sie die Ereignisse, die sie prägten, noch einmal durchlebten. Ihr besonderes Leben war sowohl ein emotionaler Maßstab für die Erfahrung als auch ein moralisches Barometer für eine Gesellschaft, die sich auf dem Weg der Selbstzerstörung befand“. Der Autor vertritt die Auffassung, dass es sowohl in der akademischen Forschung als auch im öffentlichen Bewusstsein zwei Interpretationen des Krieges gibt. Diese beiden Interpretationen prallen aufeinander, wenn es um die Deutschen während des Krieges geht. In der einen sind alle Deutschen Opfer, in der anderen sind alle Deutschen Verbrecher. Die Idee zu diesem Buch kam dem Autor während der Gedenkfeier zum sechzigsten Jahrestag des Kriegsendes im Jahr 2005, als er feststellte, dass die traditionellen Historiker bei ihrem Versuch, die richtigen Lehren aus der Geschichte des Krieges zu ziehen, eine der wichtigsten Aufgaben der historischen Forschung vernachlässigt hatten. Diese besteht darin, dass Historiker zuallererst die Vergangenheit verstehen müs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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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Buch Dieses Buch ist das Ergebnis meiner Bemühungen der letzten 20 Jahre, die Erfahrungen der Menschen zu verstehen, die während des Zweiten Weltkriegs in Deutschland oder unter deutscher Besatzung lebten. Ursprünglich hatte ich nicht vor, dieses Buch zu schreiben. Im Jahr 2005 veröffentlichte ich Witnesses to War: The Lives of Children Under the Nazis. Im Jahr 2005 versprach ich mir selbst und allen, die meine Geschichte hören wollten, dass ich nie wieder über Kinder, den Holocaust oder Nazideutschland schreiben würde. Das Buch begann als eine kurze Abhandlung darüber, wofür die Deutschen im Zweiten Weltkrieg gekämpft haben. Es entstand während meines Sabbaticals an der Freien Universität Berlin in den Jahren 2006-2007. S. 17 Dieses Buch ist eine Geschichte dieses langen Krieges. Es fasst die Veränderungen in der deutschen Gesellschaft während des Krieges zusammen und beschreibt die subtilen, oft unumkehrbaren Anpassungen der Menschen an einen Krieg, der sich zunehmend ihrer Kontrolle entzog. Es dokumentiert auch die sich wandelnden Erwartungen, schwankenden Hoffnungen und Ängste, die die Menschen erlebten, als sie die Ereignisse, die sie geprägt haben, noch einmal durchlebten. Ihr besonderes Leben wurde zum emotionalen Maßstab für Erfahrungen und zum moralischen Barometer für eine Gesellschaft, die sich auf dem Weg der Selbstzerstörung befand. S. 48 Die meisten Tötungen fanden in den Wäldern oder auf dem Regimentsfeld statt, fernab von neugierigen Blicken, einige jedoch vor den Augen von Menschenmassen. Am Samstagabend, dem 7. Oktober 1939, besprechen die in Sventz stationierten Soldaten die Massaker des Tages. Die Operation sollte am nächsten Tag fortgesetzt werden. In den frühen Morgenstunden näherte sich der Gefreite Paul Kluge der Tötungsgrube. Soldaten, die Massaker dokumentieren, halten oft das Erste fest, was sie sehen. Der erste Eindruck ist oft der stärkste. Kluge schrieb: Ein Bus hielt an einem jüdischen Friedhof und eine Frau und ihre drei Kinder stiegen aus. Die Familie ging 30 Meter bis zur Grube. Die Frau rutschte mit dem jüngsten Kind auf dem Arm in die Grube hinunter, hob dann ein anderes Kind auf, das oben stand, und ließ es zu ihr auf den Grund der Grube hinab. Das letzte Kind wurde von einem SS-Offizier abgeholt und hinuntergereicht. Die Frau legte sich mit den Kindern in die Grube. Kluge näherte sich einer Stelle, von der aus er in die Grube sehen konnte. Vier SS-Männer standen 20 Zentimeter von ihm entfernt und richteten ihre Waffen auf die Hälse der vier am Boden liegenden Körper. Als sie fertig waren, forderten sie Kluge, der sie beobachtet hatte, auf, die Leichen mit Erde zu bedecken. Kluge zögerte nicht und kam der Aufforderung nach. S. 75-76 Im Gegensatz zu Albring und Moldenhauer gab es in der deutschen Armee viele „Hinrichtungsreisende“, die filmten, wie Juden und Rotarmisten öffentlich gehängt wurden. Hermann Gischen, Mitglied des Reserve-Polizeibataillons, war Ladenbesitzer in Bremen. Er wusste, dass sein Polizeibataillon eine schwierige Aufgabe haben würde. Er stellte sich vor, dass es „ein bisschen wie in Polen“ sein würde. In Riga kaufte er einen Projektionsapparat. Er hofft, die Einsätze des Bataillons in Lettland und Russland filmen zu können, damit der Film „eine Aufzeichnung für später und sehr interessant für unsere Kinder“ sein würde. Am 7. August 1941 schrieb er an seine Frau Hanna über eine Operation, die sein Polizeibataillon durchführte. Hundertfünfzig Juden wurden in der Nacht zuvor umgebracht: Männer, Frauen und Kinder, alle ausgerottet, die Juden vollständig ausgerottet, mein lieber H., bitte denke nicht darüber nach, es ist einfach so.“ S. 252 Anfang November 1941 kamen SS-Kommandos in das Lager. Die Kommandos erschossen mehrere Juden, die sie im Keller der Zementfabrik fanden. Der Häftling, der ihm Russisch beigebracht hatte, war halbjüdisch, und in seinen Briefen an seine Frau Charlotte schrieb Jarausch nicht darüber, was mit ihm geschehen war. Er schrieb nur, dass er „Juden barfuß im Schnee laufen“ gesehen habe und dass „die schweren Dinge, die ich nicht verhindern konnte, einen sehr schmerzhaften Eindruck auf mich gemacht haben, den ich später (zu Hause) in Worten beschreiben werde.“ Zwei Tage später schrieb er mit noch größerer Begeisterung über seinen neuen russischen Lehrer, einen Moskauer, der wie er Lehrer war. Wenn er Turgenjews Romane vorlas, schien es ihm, „als ob ich die Seele des Landes berührte, sie berührte, wie die Seele sich selbst wahrnimmt und kennt.“ S. 279-280 Hans Albring verbrachte den Winter in der Kleinstadt Veliši, im hinteren Teil eines Konzentrationslagers. Als sowjetische Truppen die Stadt Ende Januar 1942 angriffen, verbrachten die Soldaten acht Wochen unter entsetzlichen Bedingungen. Ungewaschen, von Läusen zerfressen und ausgehungert, glaubte Hans, dass „es keine Übertreibung wäre, dies mit dem Jüngsten Gericht zu vergleichen“. „Durch diese Erfahrung habe ich mehr gewonnen als verloren“, schrieb er am 21. März 1942 an seinen Freund Eugen Altrogge. Zwei Wochen nach dem Ende der sowjetischen Offensive war Albring begeistert von einem Brief, den er von einem katholischen Ältesten aus Münster erhielt. Albring zitiert diesen Brief ausführlich, um den Standpunkt zu verdeutlichen, zu dem er gelangt war. Wer weiß, vielleicht ist das der metaphysische Sinn dieses Krieges: Seit Hunderten von Jahren sind wir einem falschen und zunehmend verzerrten Menschenbild gefolgt, und nun steigt ein neues und wahres Menschenbild in uns auf. S. 308 Am 27. November 1941 wurden zwölf Juden aus Horkheim in Hochfranken zum Bahnhof gebracht. Eine große Anzahl deutscher „Einwohner“ kam heraus und zeigte „Interesse und große Genugtuung“, wie es im Protokoll heißt. Die Deportation war das erste Spektakel kollektiver Gewalt gegen Juden seit den Pogromen vom November 1938. An dem Ort, an dem das Pogrom von 1938 zu einer Massenfeier mit Jungen und Mädchen der Hitlerjugend und des Bundes Deutscher Mädel wurde, wurden neue und alte Flüche auf den Zug der noch nicht gegangenen Juden geschleudert: „Seht euch diese unverschämten Juden an!“ „Jetzt kommen sie ins Ghetto!“ „Ein Haufen nutzloser Räuber!“ Als sich die alten, unterernährten Juden auf dem Marktplatz in Bad Neustadt versammelten, wurden sie von Nazi-Aktivisten fotografiert. Die Fotos wurden dann auf Plakatgröße vergrößert und in der Innenstadt ausgestellt. Als der Zug der Juden den Marktplatz in Richtung Bahnhof verließ, folgte „eine lärmende Gruppe von Schulkindern“ dem Zug bis zum Bahnhof und „schrie ihnen nach, bis der Zug abfuhr.“ S. 343 Durkefalden kam zu dem Schluss, dass Hitlers öffentliche Drohungen gegen die Juden nicht nur Worte waren. Sein Schwager Walter Kasler, der an der Ostfront gedient hatte, berichtete in einem Brief, dass es in Chiayi keine Juden mehr gab. Im Juni 1942 erzählte Walter während seines Urlaubs Karl Dürkefelden von den Massakern, deren Zeuge er geworden war, und von den Vergasungen französischer Juden, von denen er von anderen Soldaten gehört hatte. Dürkefelden gestand dies in seinem Tagebuch. Als Karl schockiert ist, bietet Walter eine Erklärung an: „Ich habe es anfangs auch nicht verstanden, aber jetzt verstehe ich es: Es geht um Leben und Tod für uns“. Der Schwager machte sich Hitlers Mantra zu eigen, das er immer wiederholte. Die Nation stehe vor einer apokalyptischen Entscheidung: „Leben oder Sterben, das ist die Frage“. Karl wandte ein. „Aber das ist Mord.“ Walters unmittelbare Antwort war diejenige, die die Nazipresse gab. Karl Durkefalden wusste, dass er dieses Gespräch beenden musste: Wenn er seinem Schwager widersprach, riskierte er, einen offenen Riss in der Familie zu verursachen. Schlimmstenfalls könnte er an die Gestapo ausgeliefert werden, aber wahrscheinlicher ist, dass die Familienbeziehungen zerbrechen und er isoliert wird. S. 353~354 Не то чтобы Гален и другие епископы были в неведении относительно Холокоста. Маргарете Цоммер руководила отделом социального обеспечения под эгидой берлинского епископа Фрейзинга. Sie sammelte Informationen darüber, was mit jüdischen katholischen Konvertiten geschah, nachdem sie ins Baltikum transportiert worden waren, und gab diese an die Bischöfe weiter. Vertrauliche Informationen erhielt sie auch von Hans Glofke, einem hochrangigen Beamten im Innenministerium. Bischof Berning von Osnabrück bestätigte dies laut Sommer am 5. Februar 1942. Das war nur zwei Wochen nach Heydrichs geheimer Gegenkonferenz, einem Gipfeltreffen, bei dem er hochrangige Beamte über die bevorstehende Vernichtung von 11 Millionen europäischen Juden informierte. Als Berning und Freising der Bischofskonferenz eine Petition vorlegten, in der sie gegen die „menschenrechtswidrigen Transporte von Nichtariern“ protestierten, waren jedoch bereits 18 Monate vergangen. Außerdem lehnte die Fuldaer Bischofskonferenz im August 1943 den Antrag ab. Selbst wenn sie ihn nicht abgelehnt hätte, war es zu spät: Die meisten Juden waren tot. Kardinal Bertram, der einflussreichste Mann im deutschen Katholizismus, weigerte sich sogar, den Bericht von Margarete Zommer anzunehmen, und sagte, er würde ihn nur akzeptieren, wenn Freising dessen Wahrhaftigkeit durch seine kreuzförmige Unterschrift garantierte. Natürlich war ihm bewusst, dass ein solches Vorgehen Sommer und Freising vor der Gestapo kompromittieren würde. Selbst wenn man davon ausgeht, dass Bertram nicht wusste, was mit den Juden geschah, so liegt das daran, dass er sich nicht darum bemühte, es herauszufinden. S. 355~356 Alles, was er versprechen konnte, war, seinen Einfluss geltend zu machen, um ein Treffen mit dem SS-Geheimdienst zu erreichen. Am nächsten Tag arrangierte der SS-Nachrichtendienst ein Treffen mit Adolf Eichmann, dem Leiter der jüdischen Abteilung des Nachrichtendienstes, für Klepper. Eichmann warnte Klepper davor, irgendjemandem von dem Gespräch zu erzählen und sagte. „Ich kann Ihnen keine endgültige Antwort geben, aber ich denke, alles wird gut gehen“, antwortete Eichmann entschlossen, als Klepper erneut von seiner Frau sprach. Eine gemeinsame Auswanderung ist nicht erlaubt.“ Am nächsten Tag rief Eichmann Klepper an, um ihn über das Ergebnis in Renates Fall zu informieren. Bei einem zweiten Treffen am 10. Dezember 1942 teilte Eichmann ihm mit, dass Renates Ausreisevisum abgelehnt worden sei. Jochen, Johanna und Renate beschlossen, Deutschland auf eigene Faust zu verlassen. „Heute gehen wir gemeinsam in den Tod“, sagten sie, hängten ein Bild von Jesus auf, der mit erhobenen Händen eine Mahlzeit segnet, und legten sich auf den Boden und betrachteten das Bild und die Gesichter der anderen. Die Schlaftabletten und das Gas wirkten. S. 374-375 Mitte April 1945 hatte die Heeresgruppe B weder Waffen noch Munition, und die Armee löste sich in den Wäldern und Städten des Ruhrgebiets auf. Am 15. April zerstörte die Bevölkerung von August Zufferbeins Stadt Solingen die Panzerabwehrstellungen, und am nächsten Tag waren fast alle Soldaten in der Stadt in Zivil gekleidet worden. Sogar ein Heeresmajor erklärte, dass er das Kommando abgeben würde, und trug dann einen schlecht sitzenden Anzug und eine Sportmütze. Am 17. April 1945, dem Tag, an dem Solingen fiel, befahl General Walter Modell, der Oberbefehlshaber der Heeresgruppe B, seinen Truppen, sich aufzulösen“, um die Übergabe der Einheit an die Amerikaner zu vermeiden. 317.000 Mann, darunter 30 Generäle, wurden gefangen genommen. Hin- und hergerissen zwischen gesundem Menschenverstand und verratenem Stolz, tat Modell, was Hitler vom Stalingrad-General Paulus verlangte: Er ging in den Wald und erschoss sich mit einer Pistole. Am nächsten Tag rückte die 97. Infanteriedivision der US-Armee in Düsseldorf ein. S. 712~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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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Austausch von Geheimnissen“ und die
„Spirale des
Schweigens“. Zu diesem Zeitpunkt wussten die Deutschen
bereits
über den Holocaust Bescheid. Zu Beginn des Jahres 1942 lebten die meisten Juden in Europa noch, doch Ende 1942 sollten die meisten Juden sterben. 1942 besuchte Kurt Gerstein, ein Desinfektionsexperte und SS-Offizier, Belzec, um zu beraten, wie die Kleidung der Juden zu desinfizieren sei. Die Juden wurden in Gaskammern zusammengetrieben. Sie wurden zweieinhalb Stunden lang eingeschlossen, während die Maschinen repariert wurden. Gerstein war Zeuge der Vergiftung der Juden von Lemberg. Er wurde von Wilhelm Pannenstiel begleitet, einem SS-Berater und Professor für Hygiene an der Universität Marburg. Der Professor war fasziniert von dem, was dort geschah. Er spähte in die Gaskammern, bis seine Brille beschlug. Er hörte das Wimmern der nackten Juden und sagte, es sei wie in einer „Synagoge“. Beim anschließenden Abendessen lobte Pannenstiel die „großartige Arbeit“ des Lagerpersonals. Gerstein bat einen schwedischen Diplomaten, die Nachricht nach Hause zu übermitteln. Er informierte auch den lutherischen Bischof von Berlin. Der Bischof schwieg, und der Bericht an Schweden wanderte in den Aktenschrank. Feldwebel Wilhelm Kornides wartete auf dem Bahnsteig des nahe gelegenen galizischen Bahnhofs Lava Ruska auf einen Zug, als 38 mit Juden beladene Viehwaggons eintrafen. Es waren die letzten Juden, die aus Lemberg ankamen, sagte ein Polizist zu Kornides. Im Zug teilte sich Kornides ein Abteil mit dem Bahnpolizisten und dessen Frau. Das Paar versprach, ihm die Vernichtungslager zu zeigen. Als der Zug durch einen großen Kiefernwald fuhr, kam von irgendwoher ein süßlicher Geruch. Ich kann es schon riechen“, ruft die Frau des Polizisten aus. Das ist Gas“, sagte der Polizist und lächelte. Es war der Geruch einer Verbrennungsanlage. Im Frühjahr 1943 gaben zwei belgische Gefangene, denen die Flucht nach Schweden gelungen war, Informationen an einen britischen Agenten weiter. Der britische Agent verfasste einen Bericht. Dem Bericht zufolge machte die Judenvernichtung den größten Eindruck auf die belgischen Gefangenen. Beide Männer hatten die Massaker miterlebt. Einer sah, wie ein Lastwagen mit Juden in den Wald fuhr und einige Stunden später zurückkehrte. Der Lastwagen war leer. Die Leichen der jüdischen Kinder und Frauen lagen in Gräben und auf Bahngleisen. Einige Deutsche brüsteten sich damit, dass sie die Gaskammern gebaut hatten, in denen die Juden systematisch ermordet wurden. Die Nachricht von den Massakern verbreitete sich schnell unter den Deutschen. Von den Vernichtungslagern aus verbreiteten sich die Gerüchte über Telefonisten, Eisenbahner und Bauingenieure in den Chemiewerken. Sie tauchten in den Gesprächen von Kneipengängern und in den Tagebüchern unzähliger Menschen auf. Bislang sind viele Historiker davon ausgegangen, dass die Deutschen Informationen über den Holocaust im Geheimen, nur unter engen Freunden und Verwandten, weitergaben. Außerhalb des engen, geschlossenen Kreises nahm man an, dass sie in Form von anonymen Gerüchten existierten. Der Holocaust sollte kein Thema für öffentliche Gespräche sein. Heinrich Himmler, Chef der deutschen Polizei und der SS, überzeugte die Führer des Dritten Reiches, dass die Vernichtung des europäischen Judentums eine Aufgabe sei, die man im Geheimen erledigen müsse und dass „wir das Geheimnis mit ins Grab nehmen müssen“. Doch nach Ansicht der Autoren dieses Buches war das Geheimnis gar kein Geheimnis. Viele Deutsche teilten das Geheimnis des Holocausts. In diesem Buch geht es um die sorgfältige und heikle Steuerung der Presse, die Goebbels einsetzte. Goebbels sorgte dafür, dass die Deutschen über die Presse Informationen über die Ausrottung erhielten. Ziel war es, ein Gefühl der Mitschuld am Massenmord zu schaffen. Auf diese Weise wurde ein „Wissen ohne Wissen“ geschaffen, ein Wissen, das keine öffentliche Loyalität oder moralische Verantwortung erforderte. Das vorliegende Buch beschreibt dieses Wissen mit dem Begriff der „Schweigespirale“. Dieser Begriff wurde 1974 von Elisabeth Nöhle-Neumann, einer Kommunikationsforscherin im Nachkriegs-Westdeutschland, eingeführt, die ihn in Bezug auf die Demokratie im Nachkriegs-Westdeutschland verwendete, aber das Konzept wurde auch durch die Ereignisse von 1941 und 1942 beeinflusst. Laut Nöhle-Neumann neigen Menschen, die sich in einer Minderheit fühlen, aus Angst vor Isolation oder sozialer Bestrafung dazu, zu schweigen. Diese Tendenz verringert die Zahl der potenziellen Personen, die Minderheitenmeinungen vertreten. Wenn die Medien über die Mehrheitsmeinung berichten, wird gleichzeitig der moralische Status der Mehrheitsmeinung gestärkt und stabilisiert. Kein Geschichtsbuch hat bisher den Schwerpunkt auf die Operationalisierung der Analyse des Holocaust gelegt. Der Holocaust hat unser Verständnis von Nazi-Deutschland und dem Zweiten Weltkrieg in den letzten zwei Jahrzehnten geprägt. Er ist ein relativ junges Ereignis. Aber auch diese Sichtweise sagt wenig darüber aus, wie die Deutschen ihre Rolle bei den Massakern des Zweiten Weltkriegs wahrgenommen haben. Die Autoren dieses Buches erzählen uns, wie die Deutschen Informationen über den Völkermord erhielten und wie sie dieses Wissen in ihr Selbstverständnis integrierten. Für die Deutschen war der Krieg wichtig, nicht der Nationalsozialismus, und so verstanden sie den Völkermord als etwas von untergeordneter Bedeutung. Daher hatten Juden und Deutsche sehr unterschiedliche Erwartungen und Ängste. Dieses Problem liegt nach Ansicht des Autors im Zentrum der Darstellung der deutschen Geschichte im Zweiten Weltkrieg. War den Deutschen bewusst, dass der Krieg ihres Landes ein Völkermord war? Und wenn ja, wie wirkte sich diese Erkenntnis auf sie aus? Oder anders gefragt: Wie hat der Zweite Weltkrieg die Wahrnehmung der Deutschen von Völkermord geprägt? Dieses Buch wirft schwierige Fragen auf und bietet einen reichhaltigen und einzigartigen Einblick in die Gedankenwelt eines Kriegsverbrecherstaa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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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el des Buches | Der deutsche Krieg: 1939 - 1945 | |
Autor und Verleger | Nicholas Stargardt, 교유서가 | |
Größe, Gewicht | 63 * 232 mm, 1480 gr. | |
Anzahl der Seiten | 976 Seiten | |
ISBN 13 | 9791193710180 | |
ISBN 10 | 1193710189 | |
E-Book ISBN 13 | 9791193710197 | |
Unterstützte Geräte | Crema/PC (Windows - 4K)/iPhone/iPad/Android phone/Android Pad/e-book | |
Datei/Kapazität | EPUB (DRM) | 65,40 MB | 767.000 Zeichen, ca. 196.000 Wörter, 976 A4-Seiten. | |
Produktkonfiguration | Band 1 | |
Verkaufspreis | 47 700 원 | |
E-Book | 39 000원 | |
Datum der Veröffentlichung | 29. Februar 2024 | |
Inhaltsverzeichnis oder Einführung in das Buch (bei Lehrmaterial für Kinder ist die Altersgruppe anzugeben) | Bitte prüfen Sie die Produktdaten | |
Umtausch/Rücksendeadresse | (10881) 249, Moonbal-ro, Paju-si, Gyeonggi-do,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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